보풀에 대하여│이성은 개인전《덧(Overlaid)》서문 (2026, 글 김예늘)

한 장소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공간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일이라기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대상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같은 장소를 오랜 시간 경험할수록, 시 선은 점차 건물의 형태나 구조보다 그 안에 쌓인 시간의 흔적을 향하게 된다. 계절에 따라 달 라지는 그늘의 위치, 관리와 방치가 겹쳐진 도로, 오래 밟혀 온 잔디의 색과 질감 같은 것들 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처럼. 


《덧 (Overlaid)》은 부산 남천동 삼익비치아파트에 축적되어 온 시간의 표면을 따라간다. 삼익 비치라는 대단지 아파트는 오랫동안 광안리 한 켠에 자리하면서 그 일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성은에게 삼익비치는 광안리를 대표하는 건축 물이 아니라, 삶 전반에 함께하는 곳이자 그 자리에서 묵묵히 가족들을 품어 준 대상이다. 작 가는 작업노트에서 "나의 기억 속 삼익비치는 건물보다도 먼저 넓은 잔디밭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바다와 아파트 사이에 놓인 잔디밭은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 기후와 생활의 흔적을 받아내며 반복적으로 밟히고 마모되어 왔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잔디 의 표면은 초록의 생동감보다 황갈색에 가깝게 눌린 색면으로 남아 있다. 반복된 발걸음과 계절의 변화 속에서 마른 잔디와 흙이 뒤섞여, 새 생명이 자라기보다 눌리고 마모되어 하나의 질감을 이룬다. 이성은이 감각하는 삼익비치의 풍경은 잘 관리된 자연의 이미지보다 그렇게 눌리고 마모된 표면의 상태에 더 가깝다. 


바슐라르가 말했듯, 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장소의 전체가 아니라 주변적인 부분들을 통해 형 성되어온다.[1] 이성은이 말하는 잔디밭 역시 그러하다. 광안리의 상징적 건축물이자 재건축을 앞둔 거대한 도시적 대상인 아파트는 작가에게 하나의 건축적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것 을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바다와 아파트 사이에 놓인 잔디밭의 표면이다. 가까이에서 바라 본 잔디는 개별적인 풀잎들의 집합이지만, 멀리서 바라볼 때 비로소 하나의 장면을 이루는 것 처럼, 이성은이 오랫동안 다루어 온 니트 역시 하나의 직물이기 이전에 셀 수 없이 많은 실과 매듭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조직이다. 잔디와 니트는 서로 다른 물질이지만, 단위들이 밀집하 고 겹쳐지면서 비로소 하나의 표면이 되는 방식이 닮아 있다.


이성은의 신작〈보풀 시리즈(Boful Series)〉는 한 단지 안에 함께 살아온 주민이자 한 곳에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이 실제로 입어왔던 니트 의류를 수집하고 다시 엮고 연결하는 방식으 로 구조물을 만든다. 몸의 시간을 오랫동안 통과한 니트의 표면은 늘어나고 닳으며 보풀을 생 성한다. 보풀은 단순한 손상의 흔적이 아니라 반복된 사용과 마찰 속에서 만들어진 접촉의 기 록이다. 흔적은 표면 속으로 숨어들어가지 않고 바깥으로 밀려 나와 또 다른 표면을 형성한 다. 이러한 섬유의 표면들을 해체하고 재결합함으로써 한 장소에 축적된 생활의 밀도와 시간 을 새로운 구조와 형태로 전환한다. 

건축보다 먼저 기억되는 잔디의 질감, 마모와 접촉이 남긴 섬유의 흔적, 그리고 쉽게 사라지 지 않는 생활의 밀도. 《덧》에서의 '덧'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덧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반복된 시간과 접촉이 표면 위로 밀어 올린 것이다. 손이 많이 간 옷에서 생겨난 보풀처럼, 그것은 안으로 숨지 않고 바깥으로 드러나 쌓여가는 잔디처럼. 이성은은 그러한 감각의 표면들을 따 라가며, 시간이 한 장소 위에 어떤 방식으로 축적되고 머무르는지를 조용히 감각하게 한다. 

글. 김예늘 

[1]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다락방, 지하실, 구석, 서랍 같은 부분 공간들에 주목한다. 집이라는 구조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 이 주변적 장소들이야말로 인간의 기억과 감각이 실제로 체화되 는 곳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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