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작가노트 2026 <보풀 시리즈(Boful Series)>

보풀 시리즈는 가족들이 실제로 오랫동안 입어 온 니트 의류를 수집하여 해체하고 다시 연결하는 방 식으로 제작되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외부로 드러나는 겉면이 아닌, 피부에 직접 맞닿아 있던 안쪽 면을 작품의 표면으로 선택한다. 이는 니트의 내부가 오랜 시간 몸의 온기와 움직임을 받아 들이며 축적해 온 시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보풀은 대부분 의류의 바깥면에서 발생한다. 반복적인 마찰과 사용 속에서 표면은 닳고 거칠어지며 작은 섬유들이 밖으로 밀려나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상대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또 다른 층이 존재한 다. 나는 이러한 안쪽 면을 통해 외부의 흔적을 견뎌낸 시간의 구조를 바라본다. 이러한 관계는 삼익비치의 잔디밭과도 닮아 있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발걸음과 계절의 변화, 바람과 비를 받아낸 잔디의 표면은 마모되고 눌려 황갈색의 질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장소를 지탱하는 토양과 뿌리의 구조가 존재한다. 마치 보풀이 일어난 니트의 겉면과 피부에 맞닿아 있던 안쪽 면이 공존하듯, 잔디밭 역시 마모된 표면과 그 안쪽의 견고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내가 작품의 외피로 사용하고자 한 니트의 ‘내부’는 단순히 뒤집힌 표면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시간 이 가장 가까이 스며들어 있던 층이며, 외부의 마찰과 변화 속에서도 삶을 지탱해 온 장소의 내부와 맞닿아 있는 기억의 구조이다. 

이러한 니트의 내부는 하나의 거대한 공과 기둥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특히 공의 형태는 보풀의 생성 방식에서 출발한다. 보풀은 반복적인 마찰 속에서 떨어져 나온 섬유들이 서로 얽히고 응집되며 자연스럽게 둥근 덩어리를 형성한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확대하여 가족들이 입어 온 니트 의류 전체를 하 나의 거대한 보풀로 전환한다. 각각의 옷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은 해체와 재결합을 거쳐 더 이상 개별적인 의류가 아닌 하나의 응집된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반면 기둥은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삼익비치 아파트의 존재를 연상시킨다. 공이 마찰과 접촉이 축적된 시간의 응집체라면, 기둥은 그러한 시간을 받아내고 지탱해 온 구조의 형상이다.


 "보풀은 바깥으로 밀려난 시간의 흔적이라면, 니트의 내부는 그 시간을 견뎌낸 구조이다." 


더하여, 본 전시는 전시는 크게 두 가지 작업군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새롭게 직조한 니트 표면이며 다른 하나는 가족들이 실제로 입어온 니트 의류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작업들이다. 


새롭게 직조된 표면은 삼익비치를 둘러싼 잔디밭에 대한 작가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나에게 잔디밭은 푸르고 울창한 자연의 이미지라기보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를 견뎌낸 표면으로 기억된다. 반복적으로 밟히고 마모된 잔디는 점차 황갈색의 색면과 질감으로 남아 있으며, 나는 이러 한 풍경을 통해 장소에 축적된 시간의 밀도를 바라본다. 따라서 이 작업들은 잔디밭의 형태를 재현하 기보다, 시간을 견뎌낸 표면의 상태를 니트의 조직으로 번역한 결과에 가깝다.

반면 해체된 니트 의류를 재구성한 보풀 시리즈는 보다 직접적인 시간의 층위를 다룬다. 이 작업에 사 용된 의류들은 나와 가족들이 실제로 오랜 시간 착용해 온 것들로, 몸의 움직임과 마찰, 생활의 습관 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특히 작가는 의류의 겉면보다 피부에 직접 맞닿아 있던 안쪽 면을 표면으 로 드러낸다. 외부에는 보풀이 생성되고 마모의 흔적이 쌓여 있지만, 내부에는 오랜 시간을 견뎌낸 몸 의 온기와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니트의 내부는 겉으로 드러난 흔적 너머에 존재하는 시 간의 구조를 보여주며,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삶을 받아낸 삼익비치의 잔디밭과도 닮아 있다.

〈관계의 구조, 공간의 형상〉


나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를 관계의 구조로 이해하고, 그것을 섬유를 통해 공간적으로 형성화 하는 작 업을 지속해 왔다. 이전 작업 및 연구에서 존재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구조적 상태였으며, 기둥과 배열은 그러한 관계를 시각화하기 위한 조형적 언어였다. 본 전시는 이러 한 관심을 보다 구체적인 공간으로 확장한다. 그 공간은 나의 과거 그리고 현재의 주소인 부산의 삼익 비치아파트이다. 


〈잔디밭의 기억, 시간을 견딘 표면〉


유년부터 현재까지 살아오며 이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나의 시간과 기억 그리고 수많은 관계가 축적된 기반이 되어 왔다. 나의 기억 속 삼익비치는 건물보다도 먼저 넓은 잔디밭으로 남아 있 다. 그러나 그 잔디는 흔히 떠올리는 선명한 초록의 풍경이 아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 온 잔디는 초록과 베이지, 마른 섬유와 흙의 색이 뒤섞인 표면이었다. 반대편에 있는 화려하고 울창한 벚꽃나무길과 다르게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하게 계절을 받아내며 색이 바래고 다시 자라나기를 반복 하며 형성된 울창한 표면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하나의 풍경이나 공간의 감각으로 현재의 나에겐 마 치 절과 같은 공간이다. 


돌이켜보면 그 잔디밭은 수십 년 동안 바다와 아파트 사이에 놓여 수많은 시간을 견뎌온 존재였다. 바 닷바람과 장마, 태풍과 폭염을 받아내면서도 사라지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밟히고 마모 되면서도 다시 자라나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초록의 생동감보다는 베이지와 황갈색이 뒤섞인 눌린 표 면, 오랜 시간 축적된 섬유 같은 질감이 오히려 내가 기억하는 삼익비치의 색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잔디밭은 끝없이 넓은 세계였다. 잔디 위의 작은 언덕은 마치 산처럼 느껴졌 고, 그곳을 오르내리는 일은 하나의 모험과도 같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다시 바라본 잔디밭은 기억 보다 훨씬 작았고, 높디높게 느껴졌던 언덕은 그저 완만한 봉우리처럼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공간이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장소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나의 시간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것은 잔디밭의 형태가 아니라, 그 공간에 축적된 시간의 밀도였는지도 모른다. 수없이 밟히고 마모되며 다시 자라난 잔디처럼, 인간의 삶 또한 관계와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 고 축적된다. 나에게 삼익비치의 잔디밭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존재가 시간을 견디며 형성되는 방 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조이자 표면이다. 나에게 삼익비치의 잔디밭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존재가 시간을 견디며 형성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조이자 표면이다.


〈재건축, 해체와 재배열〉


흥미롭게도 이러한 잔디밭의 표면은 오늘날 나의 주요 매체이자 테크닉인 니트의 표면과 닮아 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잔디는 수많은 가는 섬유들의 집합이며, 오랜 시간 사용된 니트 표면 역시 보풀과 마모의 흔적을 통해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나에게 잔디밭은 단순한 자연의 이미지가 아니라, 작 은 섬유적 단위들이 축적되어 하나의 장면을 형성하는 거대한 배열의 구조이다. 현재 삼익비치아파트는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건축 구조는 곧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로 대체될 예정이다. 재건축 현장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건물의 골격이다. 벽이 사라지고 내부가 노출되면서, 그동안 공간을 지탱해 왔던 기둥과 구조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은 철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로운 구조를 위한 기반이 된다. 


〈사라지는 집 그리고 지속되는 기억〉


본 전시에서는 삼익비치아파트에 주거하는 사람들, 나 그리고 가족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더 이상 입지 않는 니트 의류를 수집하였다. 몸의 형태를 따라 늘어나고 길들여진 후 시간의 지남에 따라 마모된 니 트는 개개인의 생활과 시간이 축적된 흔적을 품고 있다. 이는 보풀로 일어남으로써 더더욱 그 흔적을 외부로 밀어낸다. 누군가의 체온과 움직임을 기억하는 이 섬유들은 더 이상 옷으로 기능하지 않지만, 오직 그때뿐인 그 순간 자체의 흔적이자 기록을 간직한 물질로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의류들을 해체하고 다시 연결하여 거대한 섬유 기둥, 구의 구조물, 그리고 다양한 파편적 조형물로 재구성한다. 재건축 과정에서 사라지는 건축의 기둥은 주민들의 삶이 스며든 섬유를 통해 새 로운 형태의 기둥으로 다시 세워진다. 또한 해체된 니트의 조각들은 마치 잔디를 이루는 개별 섬유들 처럼 서로 얽히고 축적되며 하나의 풍경을 형성한다. 결국 이 전시는 사라질 집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집을 이루고 있던 관계와 기억의 구조가 어떻게 다른 형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탐구 하는 과정에 가깝다. 재건축은 기존 구조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배열의 시작이며, 나는 그 전환의 순간을 섬유라는 물질을 통해 기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재건축을 앞둔 공간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해체와 재건축을 통해 지속되어 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라지는 건축과 남겨진 섬유 사이에서, 나는 우리가 살아온 장소가 어떻게 몸에 스며들 거나 각인되고, 기억 속에 축적되며, 다시 새로운 구조로 형성되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나는 사라지는 건물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삶을 받아내고 지탱해 온 존재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삼익비치의 잔디밭은 수십 년 동안 바다와 아파트 사이에서 태풍과 장마,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견뎌내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잔디밭이 수많은 관계를 받아내는 표면이었다 면, 주민들이 남긴 헌 니트 또한 누군가의 몸을 오랫동안 받아내고 지탱해 온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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